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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주례 고용한 어른신 모습...(감동)

grea*** 조회 2,302

최근에 가장 친하던 친구 하나가 처음으로 결혼을 했다. 친구에 결혼이 처음인 우리들은 인생에 반려자와 새로운 출발을 하는 친구를 축하 하기위해 한자리에 모였다.바로 결혼식장이었다. 친구에 결혼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식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있는데 나에 시선을 사로잡는 한분이 계셨다. 바로 결혼식 주례를 맡으신 분이었다. 옆에 친구에게 물었다. “주례보시는 분 누구시래?” 같이 지켜보던 친구하나가 대답을 했다. “응 예식에 포함 되서 결혼식장에서 고용한 은퇴한 기업가라는데.”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한번뿐인 결혼식에서 축사를 해주시는 분이 살아오면서 눈 한번 마주치지 않은 그것도 결혼식에서 고용한 어르신이라니.’ 어이가 없었다.이어지는 친구에 대답이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야 요즘은 대부분 저렇게 한다는데.” 그랬다. 최근에 결혼식에서는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에 지나지 않았다. 주례를 맡으신 분에 축사가 이어지면서 나의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에 반려자와 새로운 출발을 하는, 최고에 축하와 찬사를 받아야할 결혼식에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축사를 해주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 누구도 그것을 원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하나 바로 아버지라는 이름이었다. 그랬다. 나에 결혼식에는 꼭 나에 하나뿐인 아버지가 나를 위해 연단에서 축사를 해주시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입학 당시 학업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어머니가 네가 하고 싶은 것이 머냐는 물음에 실용음악과에 가고 싶다고 얘기를 했고 어머니께선 나를 위해 손수 서울예대의 원서까지 사다 주셨다. 부모에 입장에서 어머니는 간절히 행여 대학이라는 문턱에도 못 가볼까 봐 최대한에 배려를 해주신 셈 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 꿈도 당시 건축 개인사업을 하시던 아버지와의 마찰로 접어야만했고 입시 성적에 맞추어 서울에서 지방대학까지 유학을 가게 되었다. 전공은 건축이었는데 입학 전 음악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전공이었다. 대학 입학 전 내가 생각했던 대학은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최고로 놀기 좋은 명소였다. 학업에 대한 책임감, 인생의 출발에 대한 밑거름, 그것은 나와는 너무나 먼 곳에 있는 것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마치 대학이라는 곳을 나만의 절대적인 형평성에 맞추듯, 학교 내 힙합댄스 연합동아리에 들었고 학교 수업은 거의 참석하지 않은 채 그렇게 신입생의 생활을 보내며 결국은 댄스동아리 회장이라는 자리까지 맡게 되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마치고 다시 2학기가 시작 될 때쯤, 학교 안에서 너무나 유명해진 나에게 보여 지는 사람들에 시선은 과히 곱지 않은 그러한 것들뿐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있어서 춤은 내가 잘할 수 있는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종전 대학입시 교육에 대한 해방구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간절히 남들이 나를 인정해 주고 알아주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에서야 대학동기들이 말하지만 그 당시 나를 “날라리” 내지는 “코걸이(당시에 코에 악세사리한 것을 보고)”라고 불렀었다고 한다. 그러한 곱지 않은 시선 속에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더욱 대담해져 갔고, 매번 교회장로(기독교 학교였음)님이 도서관 앞에서 춤추는 나를 보시고 목회실로 끌고 가서 설교를 하기가 일수였다. 그만큼 모든 이가 보기에 나는 망나니였다. 그러던 내가 방학을 맞아 그 당시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기에 너무나 싫었던 서울 집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방학동안의 생활은 행여 노란머리와 코에 악세사리를 보시고 잔소리를 하지나 않으실까 라는 마음에 그게 너무나 듣기 싫어서 아버지가 출근을 하시면 그때서야 일어나 생활하기가 일 수 였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방학 내내 아버지와 얼굴 한번 마주 칠 기회 없이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출근을 하셨다가 일찍 퇴근을 하셨는데 집에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발견 못하고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늘 아버지에게 곱지 않은 시선만을 받아왔던 터라 노란 머리를 모자로 푹 눌러쓴 채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아버지가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더니 역시나 나에게 말씀을 거셨다. “야!! 너 머리에 모자하고 얼굴에 그게 머냐?”순간 당황하며 내가 대답을 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학교에서 춤 동아리 회장을 맡았는데요;;” 아버지께서 물어보셨다. “춤? 너 대학에서도 고등학교 때처럼 춤 추냐?” “네. 저기 학교 댄스 연합동아리 회장되었는데요.” “그래? 니가 춤을 잘 추긴 하냐?” “그게 애들 말로는 잘춘다는데요.” “근데 모자는 쓰지마. 신문에서 모자를 쓰면 머리가 나빠진데. 춤을 출 라고 해도 머리는 똑똑해야 할 것이 아니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심한 꾸지람 내지는 잔소리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럼 들어 가봐 가끔 공부도 하고 해!!” 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아버지는 다시 볼일을 보시러 밖으로 나가셨다. 그 이후에도 아버지는 지방에서 내가 올라 올 때면 예전과는 다르게 내가 하는 대학생활에 꾸지람보다는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후배들에게 회장자리를 넘겨주고 군대를 다녀와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모습으로 학교에 복학 전 집에서 생활을 할 때도 역시나 아버지는 늘 나에게 엄한 아버지가 아닌 온화한 미소로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그래 이제는 공부 점 해야지?” 라고 웃으면서 말씀을 건네셨고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뒤쳐진 성적을 메우고자 과수업에 충실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군대를 다녀와서도 건축이 아닌 또 다른 꿈이 있었다. 바로 어릴 적부터 해보고 싶던 작곡가가 되는 꿈 이었다. 항상 마음속에는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욕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4학년의 학기를 무사히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졸업을 앞에 뒀을 때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공이 건축이니 건축회사에 취직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전혀 내 앞날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않고 있던 터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잠시 외출을 하신 저녁 때 퇴근하시고 방에 계시던 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안방으로 부르셨고, 안방에 들어섰을 때 어색해 하던 나를 앉으시고는 찬장에서 부스럭거리시며 조그마한 술 한 병을 꺼내셨다. 그리고는 말씀 하셨다. “이거 우리 회사 직원이 나 먹으라고 가져온 건데 같이 먹을 사람이 있어야지. 아들이랑 술 한잔하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무척이나 고지식하고 엄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버지가 아들이랑 같이 술을 한 잔하자고 하신 것이다. 처음이었다. 당황한 마음에 얼른 “네.” 라고 짧게 대답을 하고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내가 너를 어릴 적부터 쭉 지켜봤는데 그래 너는 졸업 후 무슨 일이 하고 싶냐?”진지한 질문에 약간 당황을 했지만 왠지 그런 아버지에 말씀이 너무나 편안하게 들렸고, 망설임 없이 나는 대답을 했다. “아버지. 저는 솔직하게 건축 쪽 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너는 멀 하고 싶은데?” “저는 대학 입학하기 전부터 작곡을 공부해서 방송 쪽이나 기획사 쪽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그래? 그럼 해라. 대신에 건축과 졸업을 했으니까 자격증은 하나 따둬라. 그럼 그 이후에 아빠가 좀 도와줄께.” 솔직히 그때는 그 자리가 너무 익숙하지 않아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그렇게 쉽게 대답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들이 당장 졸업 후에도 다시 작곡을 공부 하겠다는데 당장에 취직을 하라고 해도 모자랄 당신이 그렇게 쉽게 그러라고 하시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버지 말씀은 지금도 머릿속에서 아니 평생 잊혀 지지가 않을 것 같다. “너 대학갈 때 딴따라 하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반대해서 못했자나. 하고 싶은게 그거라는데 니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내가 너한테 아버지에 입장에서 해줄 말이 열심히 노력해서 꼭 꿈을 이루어라 라는 말밖에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니? 그리고 내가 여태 보니까 너 그쪽에 충분히 소질이 있는거 같더라.” 그러시곤 다른 말씀 없이 술잔을 몇 잔 더 따라주셨다. 그 뒤로 나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졸업을 했고 지금 이 순간에는 일단은 허락을 해주신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1차적인 자격증을 따려고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를 하고 있다. 물론 자격증을 취득하고 난 뒤에 향후 목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아버지와 어머니에 후원을 받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그 꿈을 이루고자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것이다. 좋은 아버지란, 사회가 말하는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할 수 있게 물질적인 후원과 잘못에 대해 질책만을 하는 아버지가 아닌 자식 본연이 가지고 있는 꿈을 실현 할 수 있도록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아버지라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나에 아버지는 정말로 나를 믿어주시고 너무나 큰 사랑을 베풀어주신 셈이다. 몇일 전인가 아버지께서 혼자 식사를 하시는데 아버지에 등판을 보게 되었다. 여지껏 그렇게 무섭고 커다랗던 아버지에 등판이 너무나 작아 보였다. 그리고 또 어머니와는 다르게 외적인 것에 관심이 없으셔서 그런지 환갑을 넘기신 아버지에 뒷머리에는 수두룩하게 많은 하얀색 새치들이 보였다. 죄송스러웠다. 늦게 대학을 졸업하고도 다시 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말만 툭 던져버리고 집에서 용돈을 받아쓰는 내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밀려왔다. 또 아직 생활이 이렇다 보니 환갑 잔치도 못해드린 내 위치가 생각나 씁쓸했다.

그랬다. 친구에 결혼식을 보면서 축사를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 또 한번 아버지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세상의 험난한 역경을 견디시면서, 그 삶에 무게를 새하얀 새치와 함께 하시면서도 나에게는 온갖 사랑과 지금에 늦은 나이에도 다시 한번 꿈을 이루라고 옆에서 격려를 마다하시지 않는 나에 아버지..........친구에 결혼을 보면서 생각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내가 꿈꾸었던 분야에 최고가 되지 않더라도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결혼식에서 나에게 사랑만을 베풀어주신 아버지를 모셔놓고 그때의 술 한 잔에 느껴졌던 따뜻함을 다시 한번 느껴보겠다고 말이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이번 공부 끝나면 꼭 사회로 진출해서 돈 많이 벌어다 드리겠습니다.’ 희망이 있기에 내일이 밝다고 생각을 한다. 주저하기에 받은 사랑이 너무나 커서 절대로 망설일 수 없다고 생각을 한다.‘아버지!! 열심히 노력해서 꼭 제 결혼식 때는 아버지에 온화한 미소를 보면서 그때에 감동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늘 건강하세요.’

그리고....‘지금껏 키워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언제일지 모를 그날에 감동이 느껴져 벌써부터 마음이 훈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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